김박사넷에서는 지도교수의 인성이 연구 실적보다 중요하다는 데 콘센서스가 맞춰져 있는 편이다. 나도 대체로 그 의견에 동의하지만, 최근 구직 경험을 하며 지도교수의 실력과 유명세 또한 너무나 중요한 요소라는, 어찌 보면 당연한 현실을 체감하게 되어 조심스럽게 경험을 공유해본다.
우리 지도교수님은 한국에서는 최정상 석학, 미국에서도 웬만하면 이름이 알려져 있는 분이시다. 하지만 그만큼 성격도 정말 '한 성격' 하신다. 다혈질에 완벽주의적 성향, 지독한 경쟁 지향성까지 있으셔서 손해를 보거나 지는 일이 생기면 밤잠을 설치는 분이기도 하다.
이분 밑에서 박사과정을 하는 동안 거의 매일이 지옥 같았다. 출신 학부를 비하하거나 부모님을 들먹이는 폭언도 밥 먹듯 하셨다. 어떤 날엔 너무 수치스러워서 극단적인 충동이 일어 옥상에 올라가 본 적도 있을 정도다. 결국 박사과정 2년 차 무렵, 정신과를 다니기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약값과 상담비로 매달 20만 원씩 지출하고 있다.
교수님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몸을 갈아 넣다 보니 디스크, 부정맥, 전당뇨 등 20대 후반-30대 초에 걸릴 수 있는 질환은 종류별로 다 얻었다. 얼마 안 되는 인건비를 받아 등록금, 월세, 식비, 병원비를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그래도 돈을 쓰니 치료는 되더라. 여담이지만 의사 선생님들께 참 감사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도교수를 정말 증오했다. 속으로 수없이 주먹질을 하고, 꿈속에서는 살인까지 해봤을 정도니까. 하지만 연구가 좋아서 내 발로 시작한 길인데, 내 나약함 때문에 도망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어두운 터널 속을 하루하루 묵묵히 걷는 것뿐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된 건, 이 터널은 방향이 정해져 있고 언젠가는 끝이 난다는 확실성 때문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노력의 방향이 정해져 있고 반드시 끝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대학원생에겐 일종의 특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수년을 앞만 보고 걸었고, 이제 터널의 끝에 도착했다. 학기가 시작하자마자 빠르게 디펜스를 마쳤고, 요즘은 본격적으로 구직활동을 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그토록 미워했던 지도교수의 존재가 내 삶을 실질적으로 편하게 만들어주고 있어서 참 복잡미묘한 감정이 든다.
박사 졸업 후 구직을 해보신 분들은 공감하겠지만, 프레시 박사가 아무리 실적이 좋아 봐야 시니어들의 눈에는 '웬 꼬마가 구구단 잘 외운다고 재롱부리는 수준'으로 보일 때가 많다. 그런데 이때마다 지도교수의 이름값이 엄청난 치트키가 되어준다.
당장 며칠 전, 모 대학 교수 임용 공개 강의 면접을 보러 갔을때 경험이다. Q&A 시간에 내 연구 주제에 대해 매우 공격적인 질문을 던지던 심사위원이 있었다. 그런데 그분이 내 이력서상 지도교수의 성함을 확인하더니, 갑자기 태도가 눈에 띄게 온화하고 호의적으로 바뀌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면접 다음 날 바로 합격 연락을 받았고, 조만간 총장 면접을 앞두고 있다.
기업 R&D 면접에서도 분위기는 대체로 좋다. 어떤 곳에서는 본부장님이 내 발표에는 질문도 안 하시고, 본인이 우리 지도교수님과 대학 시절 얼마나 절친했는지를 어필하셔서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박사 초년생 시기에 지도교수의 영향력은 정말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다행히 나는 좋은 쪽으로 덕을 보고 있지만, 반대로 우리 교수가 무명이었다면 사회라는 무한 경쟁의 정글 속에서 내가 얼마나 더 피를 흘려야 했을까 싶다.
나는 여전히 지도교수 때문에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크게 겪었기에 인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대학원은 결국 '졸업'을 통해 벗어나는 곳이다. 평생을 기준으로 보면 대학원 생활은 찰나에 불과하지만, 학위와 출신 랩은 평생을 따라다닌다.
괴로운 시간이었지만 인성이 별로일지라도 실력과 유명세가 있는 지도교수를 둔 것은, 생각보다 내 미래에 큰 자산이 되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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